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에 대한 우리의 기본 인식은 대부분 '수렵 채집 사회→농업→국가 형성→계층화'라는 단선적인 진화 도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교과서와 대중적인 역사서를 통해 끊임없이 강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데이비드 웬그로의 『모든 것의 새벽』은 이러한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획기적인 저작입니다.
최근 30여 년간의 인류학과 고고학 성과를 바탕으로 인류 역사의 새로운 서사를 제시하는 이 책은 사회적 불평등이 문명화의 필연적 대가가 아님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저자 소개: 혁신적 사상가들의 지적 협업
『모든 것의 새벽』은 두 명의 저명한 학자의 10년에 걸친 지적 협업의 결과물입니다. 첫 번째 저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Rolfe Graeber, 1961-2020)는 미국과 영국에서 활동한 인류학자이자 좌파 및 아나키스트 사회운동가로, 예일대와 런던정경대에서 인류학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그는 『부채, 그 첫 5,000년의 역사』, 『관료제의 유토피아』, 『불쉿 잡』 등의 저서로 잘 알려져 있으며,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의 주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레이버는 2020년 9월,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이 책이 그의 유작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저자인 데이비드 웬그로(David Wengrow)는 영국의 고고학자로, 현재 런던 유니버시티칼리지 고고학연구소의 비교고고학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그는 『이집트 초기의 고고학』, 『무엇이 문명을 만드는가?』 등의 저서를 통해 고대 문명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왔으며, 20년 이상의 현장 고고학 경험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발굴 작업을 이끌어왔습니다.
책의 주요 내용: 인류 역사에 대한 혁명적 재해석
단선적 역사관에 대한 도전
『모든 것의 새벽』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인류 역사가 특정한 방향을 따라 단계적으로 진화했다는 관점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인류가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발전해왔으며, 흔히 말하는 '진보'의 과정이 필연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은 17세기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나 장 자크 루소와 같은 사상가들이 제시한 인류의 '자연 상태'에 대한 해석부터 시작하여, 현대의 유발 하라리와 같은 역사가들이 수렵 채집인을 "정치적 자의식 없는 유인원"으로 취급하는 관점까지 비판합니다. 그레이버와 웬그로는 이러한 관점들이 모두 사회 진화론적 도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합니다.
수렵 채집 사회의 재발견
저자들은 수렵 채집인들도 정치적 자의식을 갖춘 인간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유라시아 서부에서 발견된 빙하 시대 수렵 채집인들의 화려한 무덤과 장신구, 튀르키예 남동부 괴베클리 테페의 거대 구조물은 농경 시대 이전에도 대규모 집회와 협력적 건축이 가능했으며, 농업 없이도 복잡한 사회 구조와 지위, 계급, 세습 권력이 존재했음을 시사합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북극권 이누이트족의 사례로, 이들은 계절에 따라 통치체제를 바꾸는 정치적 실험을 했다는 점입니다. 여름에는 소규모로 나뉘어 수렵 채집을 하면서 강력한 가부장제를 작동시키는 반면, 겨울에는 함께 모여 평등한 집합적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인류가 정치적 시스템을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변경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입니다.
사유재산과 농업에 대한 새로운 관점
전통적으로 사유재산은 농경 사회의 잉여 생산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레이버와 웬그로는 이러한 관점에 도전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소유권은 신성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제의에 사용되는 신성한 물건이 타인의 손길에서 격리되는 것처럼 사적 재산 개념도 본질적으로 배제의 구조를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책은 인류가 농업으로 단번에 전환했다는 관점도 거부합니다. 저자들은 초기 인류가 수렵·채집 생활을 하면서도 느슨한 형태의 농경을 실천했으며, 농사가 "뛰고, 비틀거리고, 허풍을 떨며"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도시와 국가의 기원에 대한 재해석
『모든 것의 새벽』은 초기 도시들이 반드시 왕이나 중앙집권적 권력 없이도 형성될 수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계곡, 우크라이나, 중국 등 유라시아 최초의 도시들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저자들은 복잡한 도시 생활이 반드시 계층화된 사회 구조를 필요로 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책의 10장 "국가에 기원이 없는 이유"에서는 주권, 관료제, 정치의 시작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소박했으며, 국가가 필연적인 발전 단계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자유와 평등 개념의 기원
가장 놀라운 주장 중 하나는 민주주의와 자유·평등의 이념이 유럽 계몽주의 지식인이 아니라 아메리카 선주민에게서 발원했다는 것입니다. 16세기 스페인 문헌에 따르면, 당시 스페인인들은 틀락스칼라의 민주적 사회 운영 시스템에 감명을 받았으며, 이것이 후에 유럽의 계몽주의적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는 추론입니다.
책의 의의와 영향
『모든 것의 새벽』은 출간 이후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오웰상 정치 부문 최종 후보에도 올랐습니다. 이 책이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고정관념을 뒤집는 혁신적인 관점과 풍부한 고고학적, 인류학적 증거를 제시하며, 현대 사회의 불평등과 계층화가 필연적인 것이 아님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총 9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전문 학술 영역 안에서만 논의되어온 새로운 고고학·인류학 증거들을 대중적인 언어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특히 인류가 과거에 다양한 사회모델과 협력 방식을 실험했듯, 미래 역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메시지는 현대 사회의 대안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영감을 제공합니다.
비판과 한계점
모든 혁신적인 이론이 그렇듯, 『모든 것의 새벽』도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책이 기존 역사관을 전복시키기에는 고고학적 증거가 아직 뚜렷하지 않다는 한계를 지적합니다. 또한 역사의 물질적 조건과 결정론적 측면을 너무 가볍게 다루고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시카고 대학의 역사학자는 이 책이 "레토릭에 의존하고 방법론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수십 년 만의 가장 중요한 고고학 출판 이벤트"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이 책이 가진 양면성을 잘 보여줍니다.
결론: 인류 역사의 새로운 이해를 향하여
『모든 것의 새벽』은 인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만드는 중요한 저작입니다. 비록 모든 주장이 완벽하게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은 기존의 단선적이고 결정론적인 역사관에 도전함으로써 우리에게 더 넓은 시야와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레이버와 웬그로의 주장대로, 인류 역사는 단 하나의 경로를 따라 발전해 온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되고 변화해 왔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 사회의 불평등과 억압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결국 『모든 것의 새벽』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닌, 우리의 과거를 재해석함으로써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지적 도전이자 정치적 선언입니다. 그레이버의 유작으로서, 이 책은 그의 사상적 유산을 담아내며 우리에게 "모든 것의 새벽", 즉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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