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리뷰

김훈의 '허송세월': 노년의 빛과 그림자를 담아낸 산문집 심층분석

꿀깨비 2025. 5. 2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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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허송세월': 노년의 빛과 그림자를 담아낸 산문집 심층분석

 

 

2024년 6월, 한국 문학계의 거장 김훈이 5년 만에 신작 산문집 '허송세월'을 출간했다.

 

'자전거 여행'과 '연필로 쓰기'의 저자가 이번에는 노년의 시선으로 삶과 죽음, 글쓰기의 본질, 그리고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성찰을 담백하게 풀어냈다.

 

본 분석에서는 허송세월의 구조와 내용, 주제의식, 그리고 김훈이라는 작가의 세계관을 깊이 탐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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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개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빛나는 산문의 세계

'허송세월'은 총 3부로 구성된 45편의 글로 이루어진 산문집이다. 나남출판사에서 2024년 6월 20일에 출간되었으며, 김훈 작가가 76세의 나이에 펴낸 작품이다. 제목 '허송세월'은 흔히 '하는 일 없이 세월만 헛되이 보냄'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작가는 이를 역설적으로 활용하여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라고 표현한다. 

 

이는 청년 시절 "혀가 빠지게 일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노년에 접어든 지금의 시간을 허송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에서 오히려 충만함을 느낀다는 작가의 역설적 고백이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 1부 '새를 기다리며': 노년의 일상과 죽음에 대한 사색이 담긴 14편의 글
  • 2부 '글과 밥': 글쓰기의 철학과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에 관한 이야기
  • 3부 '푸르른 날들': 역사 속 인물들과 현대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성찰

작가 김훈: 대한민국 최고의 문장가

김훈(金薰)은 1948년 5월 5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수학했으나 중퇴했다. 1974년 기자로 시작해 1994년 소설가로 등단한 그는 '칼의 노래'(2001), '남한산성'(2007), '하얼빈' 등의 소설로 한국 문학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김훈은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딱 맞아떨어지는, 우리 시대 몇 안 되는 글쟁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그를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 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의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촌철살인적이며, 냉철하지만 따사로운 시선과 사유가 특징이다. 특히 주어와 술어가 떨어지지 않는 문장을 선호하며, 불필요한 수식어를 배제하는 깔끔한 글쓰기를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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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내용 분석: 노년과 죽음, 그리고 삶의 의미

1. 노년의 시간과 죽음에 대한 사색

 

'허송세월'의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노년의 시간과 죽음에 대한 사색이다. 76세의 작가는 심혈관 계통 질환으로 크게 아팠다고 고백하며, "신체 부위와 장기마다 골병이" 든 몸으로 살아가는 일상을 담담하게 그린다. 특히 죽음을 일상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가 인상적이다.

 

"화장장에 다녀온 날 이후로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 죽음이 저토록 가벼우므로 나는 이 가벼움으로 남은 삶의 하중(荷重)을 버티어 낼 수 있다. [...]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 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

 

작가는 코로나 팬데믹 당시 심장질환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 경험을 통해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체험을 기록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이 세상에 땅이 있어서 인간의 걸음을 받아 주었다"는 감사함과 "살던 세상으로 돌아오길 잘했구나"라는 다행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2. 글쓰기의 철학과 언어에 대한 성찰

김훈에게 글쓰기는 단순한 직업이 아닌 삶의 방식이다. 그는 "쓰이기를 원하는 것들과 남에게 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속에서 부글거리는 날에는 더욱 문장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형용사와 부사와 같은 불필요한 수식어를 경계하고, "웃자라서 쭉정이 같고, 들떠서 허깨비 같은 말"을 버리려는 그의 노력은 언어에 대한 깊은 존중과 책임감을 보여준다.

 

"말은 고해를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주어와 술어 사이가 휑하니 비면 문장은 들떠서 촐싹거리다가 징검다리와 함께 무너진다. 쭉정이들은 마땅히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므로, 이 무너짐은 애석하지 않다. 말들아 잘 가라."

3. 역사적 인물과 현대 사회에 대한 성찰

3부 '푸르른 날들'에서는 찰스 다윈,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 안중근 등 난세를 살면서도 푸르게 빛났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김훈의 사색이 담겨 있다. 그는 이들을 "내 마음속의 영원한 청춘"이라고 표현하며, 이들의 삶을 통해 현대 사회의 문제를 되짚어 본다. 또한 박경리, 신경림, 백낙청, 강운구, 두봉 주교 등 그와 동시대를 살아왔던 인물들에 대한 회상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저자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 - 저출산, 산재 사망, 사회적 참사, 이념 과잉 등 - 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쳐 보인다. "민주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기술 혁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청춘들의 사포 시대(연애, 결혼, 출산, 취업 포기)가 열렸다"는 언급은 발전 이면에 감춰진 현대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주요 메시지 집중 분석: 불완전함의 수용과 삶의 겸손

'허송세월'의 핵심 메시지는 인간과 세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한 태도에 있다. 김훈은 "이 세계와 인간의 영원한 불완전성을 말하려고 한다"면서도 "그 불완전성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세계와 인간을 대하는 마음에서 겸손과 수줍음과 조심스러움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자신의 글에 대해서도 철저히 겸손한 태도를 유지한다. "인쇄된 나의 글을 읽지 않는다"라면서 "책값을 내고 이걸 사서 읽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식은땀이 난다"고 고백하는 모습에서, 글쓰기라는 행위에 대한 그의 진지한 태도와 독자에 대한 존중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작가는 삶의 무상함과 죽음의 가벼움을 통해 역설적으로 현재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여기저기서 또래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온다. [...] 내가 미워했던 자들도 죽고 나를 미워했던 자들도 죽어서, 사람은 죽고 없는데 미움의 허깨비가 살아서 돌아다니니 헛되고 헛되다"라는 구절은 인간 감정의 무상함과 화해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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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분석: 역사와 현재를 잇는 푸르른 영혼들

산문집의 특성상 허송세월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캐릭터는 없지만, 김훈이 주목하는 몇몇 인물들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역사적 인물들: 청춘의 상징

김훈은 찰스 다윈,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 안중근과 같은 역사적 인물들을 "내 마음속의 영원한 청춘"으로 표현한다.이들은 난세를 살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미래를 위해 씨앗을 뿌린 선구자들이다. 특히 안중근의 침묵은 김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그는 '안중근의 침묵'이라는 별도의 글을 통해 이를 탐구한다.

동시대 인물들: 문학과 예술의 동반자

박경리, 신경림, 백낙청, 강운구와 같은 동시대 문인과 예술가들에 대한 회상은 김훈의 문학적 여정을 함께 해온 이들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보여준다. 특히 '박경리, 신경림, 백낙청 그리고 강운구'라는 글에서 그는 이들과의 교류와 그들의 작품세계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나눈다.

두봉 주교: 종교적 영감의 원천

천주교 신자인 김훈에게 두봉 주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주교님의 웃음소리'라는 글에서 그는 두봉 주교를 통해 종교적 영감과 인간적 따스함을 발견하는 경험을 서술한다. 이는 작가의 천주교 신앙(세례명: 아우구스티노)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인물 간의 관계 분석: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대화

김훈의 산문집에서는 작가와 다양한 인물들 간의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작가가 역사적·현대적 인물들과 맺는 정신적 연결성이 중요하다. 작가는 역사적 인물들의 삶과 정신을 통해 현대 사회의 문제를 성찰하고, 동시대 인물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문학관을 형성해 왔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세대를 초월한 '청춘'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다. 김훈에게 청춘은 단순한 나이가 아닌 정신적 태도와 관련된다. 찰스 다윈, 정약용, 안중근과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내 마음속의 영원한 청춘"이라는 표현에서, 그가 청춘을 시간적 개념이 아닌 불의에 맞서 싸울 줄 아는 용기와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정신적 태도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이들아,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아라"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미래 세대와의 대화를 시도하며,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끊임없는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김훈이 자신의 글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인간적 연결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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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허송세월의 가벼움으로 버텨내는 삶의 무게

'허송세월'은 단순한 노년의 회고록이 아니라, 76세의 노작가가 자신의 삶과 글쓰기의 철학,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낸 지적 여정의 기록이다.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라는 구절은 죽음의 가벼움으로 삶의 무게를 견디는 김훈의 철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도 아름다움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위안과, 불완전한 세상에서 불완전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지혜를 전한다.

 

김훈의 언어는 여전히 명징하며, 그의 시선은 이 세상의 기쁨과 슬픔을 꿰뚫고 있다. '허송세월'은 그렇게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가 선사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가장 성실한 사유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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