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의 마지막 장편소설 『바움가트너』: 상실과 기억의 아름다운 서사
아내를 잃고 환지통처럼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는 노교수의 내밀한 여정을 그린 『바움가트너』는 2024년 4월 세상을 떠난 폴 오스터의 마지막 작품으로, 작가의 1주기를 맞아 2025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상실과 애도,, 기억과 현재, 삶의 의미를 사유하는 깊이 있는 소설로, 오스터가 평생 다뤄온 주제들을 집약해 보여줍니다.
소설의 주요 내용과 이야기 구조
『바움가트너』는 프린스턴 대학 철학과 교수 사이 바움가트너의 일상에서 시작됩니다. 은퇴를 앞둔 71세의 노교수인 그는 10년 전 수영 사고로 아내 애나를 잃고 깊은 상실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바움가트너는 크고 작은 임무와 약속, 사건과 과제가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혼란스러운 하루를 맞이합니다.
그날 아침, 바움가트너는 불이 붙은 알루미늄 냄비를 맨손으로 들어 화상을 입고, 계량기 검침원에게 계량기 위치를 알려주러 지하실로 내려가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팔꿈치와 무릎에 부상을 입습니다. 이런 소동은 그의 취약하고 위태로운 현재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까맣게 그을린 냄비가 바로 50년 전 가난했던 학생 시절 10센트를 주고 샀던 것이며, 그 냄비를 산 가게에서 그는 평생의 사랑이 될 아내 애나를 처음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이 우연한 계기로 바움가트너의 기억이 점화되어 소설은 1968년 뉴욕에서 가난한 문인 지망생으로 아내를 처음 만난 이후 함께한 40년간의 세월, 그리고 뉴어크에서의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소설 속에는 아내 애나의 시와 자전적 기록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연애편지들, 바움가트너 자신이 쓴 산문 등 다양한 형태의 글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독자는 "자칭 무정부-평화주의자이자 신을 믿지 않는 투사"인 바움가트너의 아버지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자란 그의 어머니 등 바움가트너의 뿌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환지통의 은유와 상실의 감각
바움가트너는 자신이 겪는 상실감을 '환지통'에 비유합니다. 환지통이란 절단된 팔이나 다리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통증을 느끼는 현상입니다.
"그는 이제 인간 그루터기,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주었던 반쪽을 잃어버리고 반쪽만 남은 사람인데, 그래, 사라진 팔다리는 아직 그대로이고, 아직 아프다. 너무 아파서 가끔 몸에 당장이라도 불이 붙어 그 자리에서 그를 완전히 태워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러한 비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의 아픔을 신체적 고통으로 형상화하여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바움가트너는 이러한 상실과 애도의 과정 속에서도 아내의 미출간 시들을 정리해 시집으로 출간하는 등 아내의 흔적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삶과 죽음의 연결, 기억의 힘
소설의 중심 메시지는 꿈속에서 바움가트너가 애나와 나눈 가상의 대화에서 드러납니다:
"그가 살아 있고 그녀에 관해 계속 생각할 수 있는 한 그녀의 의식은 그의 생각에 의해 깨어나고 또 깨어날 것이며, 심지어 가끔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그의 생각들을 듣고 그의 눈을 통해 그가 보는 것을 볼 수 있다. (…)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되어 있으며,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룩했던 깊은 연결은 죽어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상실 이후에도 사랑하는 이들과의 연결이 기억을 통해 유지될 수 있다는 위로를 전합니다. 또한 "타버린 냄비와 오래된 커피잔, 마당의 새와 새하얀 구름으로부터 이미 사라진 과거에서 떠내려온 〈기억의 부유물〉들"을 통해 바움가트너는 삶의 의미를 찾아갑니다.
인간 관계의 중요성과 삶의 가치
소설 속에서 바움가트너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청혼하며 인간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삶이 없는 것과 같죠. 운이 좋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 그 다른 사람이 자신만큼 중요해질 정도로 가까워지면, 삶은 단지 가능해질 뿐 아니라 좋은 것이 돼요."
이는 삶의 가치가 깊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오스터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모두 서로 의존하고 있고 어떤 사람도, 심지어 가장 고립된 사람이라 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폴 오스터,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폴 오스터(1947-2024)는 미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소설, 시, 에세이, 번역, 평론, 시나리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는 펜/포크너상, 메디치상 외국문학 부문 등을 수상했으며, '빵 굽는 타자기', '폐허의 도시', '달의 궁전', '뉴욕 3부작' 등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오스터의 문학적 특징은 사실주의와 신비주의의 결합, 도회적 감수성이 풍요로운 언어와 문학적 기교로 표현되는 점입니다. 그는 동시대의 일상, 열망, 좌절, 고독, 강박 등 인간사의 다채로운 면모를 탁월하게 그려냈습니다.
『바움가트너』는 오스터가 투병 중 끝을 예감하며 집필한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그의 1주기에 맞춰 출간되었습니다.이 작품에서 그는 평생 동안 다뤄왔던 글쓰기와 허구가 만들어 내는 진실과 힘, 우연의 미학에 대한 사유를 노교수 바움가트너를 통해 풀어냅니다.
결론: 상실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의미
『바움가트너』는 상실과 애도의 과정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립니다. 오스터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랑하는 이를 잃은 후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섬세하게 묘사하면서도, 그 상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억의 가치와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강조합니다.
"그런 상실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상실의 슬픔은 어느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기억의 작은 파편들 속에서 다시금 살아 움직인다." 이 문장은 소설의 핵심 주제를 잘 보여줍니다.
바움가트너가 텅 빈 곳에 남아 있는 잔해들의 반짝임, 그리고 긴 시간을 통과하는 '변화'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힘을 얻는 과정은 독자에게도 깊은 위로와 사색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오스터는 이 마지막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에 건조하면서도 온기 있는, 폴 오스터다운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이 소설은 마치 오스터가 자신의 생을 마감하면서 남긴 마지막 메시지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앞으로도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 오스터가 계속 살아있을 것임을 암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