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천 교수가 9년간의 집필 끝에 완성한 역작 '숙론'은 현대 한국 사회의 깊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대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합니다.
2024년 5월 10일 김영사에서 출간된 이 책은 단순한 대화 방법론을 넘어 우리 시대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철학적 접근을 담고 있습니다.
숙론의 개념과 필요성
'숙론(熟論, Discourse)'이란 무엇일까요? 최재천 교수는 이를 "누가 옳은가(Who is right?)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What is right?)를 찾는 과정"이라고 정의합니다. 기존의 토론이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는 말싸움으로 변질된 데 반해, 숙론은 서로의 생각이 왜 다른지 궁리하고 어떤 문제에 대해 함께 숙고하며 충분히 의논해 좋은 결론에 다가가는 행위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이념, 젠더, 세대, 계층, 환경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최재천 교수는 이러한 사회적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제대로 된 대화, 즉 '숙론'이라고 강조합니다.
"지금 여기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마주 앉아 제대로 하는 대화다. 이기기보다 이해하는 대화다." 이 문장은 책의 핵심 메시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줍니다.
책의 구성과 주요 내용
'숙론'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는 숙론의 필요성부터 구체적인 실행 방법까지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1부 '숙제(宿題): 재미있는 지옥, 대한민국의 난제들'에서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갈등 상황을 분석하고, 동물행동학자로서 인간과 동물의 의사소통을 비교하며 진정한 소통의 어려움을 고찰합니다.
2부 '교육(敎育): 같은 견해와 다른 견해를 알고 사랑하는 시간들'에서는 소통 능력 부재의 근원을 교육에서 찾습니다. 최재천 교수는 한국 교육이 "공존을 위한 협력과 배려를 배우는 곳이 아니라 오로지 신분 상승을 꾀하는 경쟁의 각축장"으로 변질된 현실을 '토붕와해(土崩瓦解)'라고 표현하며 비판합니다.
3부 '표본(標本): 앵무새 대화와 헛소리를 하지 않는 본보기들'에서는 하버드 학생들의 토론 문화, 테드 카펄의 대화법 등 바람직한 대화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4부 '통섭(統攝): 불통을 소통으로 바꾸는 시나리오들'에서는 제돌이 야생방류, 코로나19 일상회복지원위원회 등 최재천 교수가 직접 경험한 숙론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5부 '연마(練磨): 바람직한 숙론을 이끄는 기술들'에서는 숙론의 목적과 진행 방법, 중재자의 역할 등 실질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합니다.
토론과 숙론의 차이
최재천 교수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상대를 이기기 위한 말싸움으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토론이라는 단어에 이미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를 전제하는 사회적 맥락이 형성되었기에, 진정한 의견 교환과 합의의 과정으로 '숙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합니다.
그는 특히 대통령 선거 토론에서도 후보자들의 실수를 유도하고 부각시키는 현재의 방식 대신, 후보자의 정책과 방향에 중점을 두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교육과 숙론의 관계
최재천 교수가 '숙론'을 집필하게 된 배경에는 한국 교육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와 미시간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경험한 활발한 토론 문화와 달리, 한국으로 돌아와 마주한 침묵의 강의실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서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유독 토론만큼은 못해도 너무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배우지 못해서 그렇다."
최 교수는 정규 교육 과정에 토론을 포함시키고, 토론을 이끌어갈 진행자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그는 한국인을 "교육에 특화된 민족"이라고 평가하며, 토론 교육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금방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자 최재천에 대하여
최재천 교수는 1954년 1월 6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동물행동학자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생태학 석사학위를, 하버드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0년부터 1994년까지 하버드대학교 전임강사와 미시간대학교 조교수로 근무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한국생태학회장, 국립생태원 초대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통섭(統攝, Consilience)'이라는 개념을 한국에 소개하며 21세기에는 다양한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연결하는 통합적 지식이 필요함을 역설해왔습니다. 또한 2005년 호주제 폐지에 기여한 공로로 남성 최초로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서로는 '개미제국의 발견',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과학자의 서재', '통섭의 식탁' 등 다수가 있습니다.
숙론의 사회적 의의
최재천 교수는 상대를 제압하려는 토론을 넘어 서로 존중하고 대화하는 숙론 문화가 정착된다면, 한국이 "전 세계가 존경하는 진정한 선진국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는 단순한 소통 기술의 향상을 넘어, 사회 통합과 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특히 책에서 소개하는 남아공의 몽플레 프로젝트는 인종 차별이라는 극심한 갈등 상황에서도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는 숙론을 통해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사례로, 숙론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결론
'숙론'은 단순한 대화 기술서가 아닌, 분열된 현대 사회의 근본적인 소통 방식을 재고하는 철학서이자 실천 매뉴얼입니다. 최재천 교수는 "알면 사랑한다"는 문장을 자신의 책에 사인할 때마다 적는다고 합니다. 이는 숙론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서로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알 때, 우리는 비로소 갈등을 넘어 합의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9년간의 깊은 고민과 풍부한 경험이 담긴 이 책은, 토론과 소통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사회에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열어줄 것입니다. 최재천 교수의 '숙론'은 단순한 책을 넘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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