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은 파시즘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로버트 O. 팩스턴의 40년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역작으로, 파시즘에 대한 학문적 논쟁과 대중적 인식을 새롭게 정립했습니다.
원제 『The Anatomy of Fascism』(2004)으로 출간된 이 책은 파시즘을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닌 구체적 정치 행위로 접근하며, 이탈리아와 독일의 사례를 중심으로 파시즘의 발생부터 몰락까지 전 과정을 세밀하게 해부합니다.
이 책은 단순히 파시즘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파시즘의 본질과 작동 방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저자 로버트 O. 팩스턴: 파시즘 연구의 거장
로버트 오웬 팩스턴(Robert Owen Paxton, 1932년 6월 15일 출생)은 현대사의 대가이자 파시즘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입니다. 워싱턴대학과 옥스퍼드대학에서 수학하고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69년부터 컬럼비아대학 사회과학대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997년부터는 명예교수로서 프랑스 역사와 20세기 역사, 파시즘을 강의해왔습니다.
팩스턴은 1970년대 비시 프랑스(Vichy France) 연구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가 나치에 자발적으로 협력했음을 입증해 큰 충격을 안겼고, 이로 인해 '팩스턴 이전의 비시와 팩스턴 이후의 비시'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학문적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1997년에는 프랑스의 모리스 파퐁(Maurice Papon) 전범 재판에 전문가 증인으로 초빙될 만큼 그의 학문적 권위는 인정받고 있습니다.
책의 구성과 주요 내용
『파시즘』은 역사서이자 파시즘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서입니다.
팩스턴은 연대기적으로 파시즘의 역사를 서술하며 각 시대별 사회·경제적 조건과 정치적 행위자 간의 상호작용을 명료하게 분석합니다. 그는 파시즘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접근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역사적 현상으로 살펴봄으로써 파시즘의 실체를 추출해냅니다.
파시즘의 5단계 발전 모델
팩스턴은 1998년 "The Five Stages of Fascism"이라는 영향력 있는 논문에서, 나중에 이 책의 기초가 된 파시즘의 5단계 발전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 지적 탐색 단계: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이 국가적 활력 상실에 대한 논의로 나타나는 시기
- 뿌리내리기 단계: 정치적 교착 상태와 양극화의 도움을 받아 파시스트 운동이 국가적 무대에서 주요 행위자로 등장
- 권력 획득 단계: 보수 세력이 좌파 세력을 통제하고자 파시스트를 권력에 초대
- 권력 행사 단계: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운동이 경찰, 성직자, 기업가 등 전통적 엘리트와 균형을 이루며 국가를 통제
- 급진화 또는 엔트로피 단계: 국가가 나치 독일처럼 점차 급진화되거나, 이탈리아 파시즘처럼 전통적 권위주의 통치로 전락
팩스턴은 이 모델을 통해 파시즘이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복잡한 정치적 현상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만이 모든 5단계를 거쳤다고 지적합니다.
파시즘의 정의
팩스턴은 『파시즘』에서 다음과 같은 파시즘의 정의를 제시합니다:
"파시즘은 공동체의 쇠퇴, 굴욕, 또는 희생양 의식에 대한 강박적 집착과 단결, 에너지, 순수성에 대한 보상적 숭배로 특징지어지는 정치적 행동 양식이다.
이러한 행동 양식에서는 헌신적 민족주의 운동가들의 대중 기반 정당이 전통적 엘리트와 불안하지만 효과적인 협력을 통해 민주적 자유를 포기하고 내부 정화와 외부 팽창이라는 목표를 윤리적 또는 법적 제약 없이 구원적 폭력을 통해 추구한다."
이 정의는 파시즘을 이념적 측면보다는 행동과 실천의 측면에서 포착한 것으로, 팩스턴의 접근법을 잘 보여줍니다.
책의 주요 주장과 통찰
파시즘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정치적 행동
팩스턴의 가장 중요한 통찰 중 하나는 파시즘이 다른 '이즘'과 달리 일관된 철학적 체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파시즘이 "행동에 앞서 사고를, 직관에 앞서 이성을, 지적 자유에 앞서 공동체 의무를, 보편적 가치에 앞서 민족주의를 우선시한 운동"을 특징짓는 공통된 지적 입장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팩스턴은 "파시즘은 이즘인가?"라고 물으며, 파시즘이 이념보다는 감정에 의해 추동된다고 주장합니다.
파시즘과 보수 엘리트의 협력
팩스턴은 파시즘이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수주의 기득권 세력과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파시즘 체제를 "에폭시(epoxy)"에 비유하며, "파시스트적 역동성과 보수적 질서라는 두 가지 매우 다른 요소가 자유주의와 좌파에 대한 공유된 적대감, 그리고 공동의 적을 파괴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으려는 공유된 의지로 결합된 혼합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통찰은 파시즘이 단독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보수 세력의 묵인 또는 협력 하에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파시즘의 등장 조건
팩스턴은 파시즘 등장의 배경으로 네 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 볼셰비키 혁명의 승리, 대중 사회주의 정당의 부상, 그리고 개인과 이성의 가치보다 인종, 공동체 또는 국가의 가치를 높이는 문화적 주제의 등장입니다.
특히 그는 파시즘이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태어났다"고 지적하며, 종전 무렵 유럽이 "재건 불가능한 구세계와, 그들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신세계로 분열됐다"고 설명합니다. 인플레이션의 통제불능 상태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가 중간계급과 상류층을 두려움으로 몰아넣어 파시즘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파시즘의 폭력성과 '적'의 필요성
파시즘은 악마화된 '적'을 필요로 하며, 테러와 폭력이 그 핵심에 있습니다. 팩스턴은 "체제의 적들에게서 시작된 폭력은 파시즘의 '보수파 동맹 세력'을 거쳐, 결국 일반 국민을 상대로도 무차별 행사됐다"고 지적합니다. 처음에는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점차 확산되어 사회 전체를 위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현대적 의미와 교훈
팩스턴의 연구는 과거의 역사적 현상으로서만이 아닌 현재의 정치적 위험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특히 그는 2021년 트럼프가 파시스트라는 견해를 밝히며, 미국 의회 난입 사태가 그의 견해를 바꾸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언급했습니다. 파시즘이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재현될 수 있는 위험임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파시즘』은 파시즘이 어떻게 민주주의 체제의 틈새를 파고들어 성장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보수 엘리트와의 협력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지 보여줌으로써,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경계심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뿐만 아니라 파시즘이 단순히 폭력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회적 불안과 불확실성이 만연한 시기에 등장하는 정치적 현상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결론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은 20세기의 가장 어두운 정치 현상 중 하나를 명료하게 해부한 중요한 저작입니다. 그는 파시즘이 무엇인지, 어떻게 발생하고 성장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권력을 행사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파시즘의 위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 책은 파시즘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그것의 작동 방식과 성공 요인을 파악함으로써 현대 사회에서 파시즘적 위험을 인식하고 예방하는 데 중요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팩스턴의 접근법은 파시즘을 단순한 이념적 현상이 아닌 구체적인 정치적 행위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우리가 현실 정치에서 파시즘의 징후를 더 잘 식별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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